니콜라스 브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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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콜라스 브라보는 멕시코 독립 전쟁, 멕시코 제1제국, 멕시코 제1공화국, 멕시코 중앙집권 공화국, 멕시코-미국 전쟁 등 멕시코의 여러 중요한 시기에 걸쳐 활동한 군인, 정치인이다. 그는 독립 전쟁에서 활약하고 부통령을 역임했으며, 세 차례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또한, 멕시코-미국 전쟁에서 차풀테펙 전투에 참전했으나 포로가 되었다. 브라보는 정치적 격변 속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멕시코 역사에 중요한 흔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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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브라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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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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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책 | 멕시코의 대통령 |
임기 시작 1 | 1839년 7월 10일 |
임기 종료 1 | 1839년 7월 19일 |
이전 대통령 1 |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
다음 대통령 1 |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 |
임기 시작 2 | 1842년 10월 26일 |
임기 종료 2 | 1843년 5월 14일 |
이전 대통령 2 |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
다음 대통령 2 |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
임기 시작 3 | 1846년 7월 28일 |
임기 종료 3 | 1846년 8월 4일 |
부통령 3 | 본인 |
이전 대통령 3 | 마리아노 파레데스 |
다음 대통령 3 | 호세 마리아노 살라스 |
직책 4 | 멕시코 제국 섭정의 보컬 |
임기 시작 4 | 1822년 4월 11일 |
임기 종료 4 | 1822년 5월 18일 |
직책 5 | 멕시코 합중국 제1대 부통령 |
임기 시작 5 | 1824년 10월 10일 |
임기 종료 5 | 1827년 12월 23일 |
대통령 5 | 과달루페 빅토리아 |
다음 부통령 5 |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 |
직책 6 | 멕시코 공화국 제4대 부통령 |
임기 시작 6 | 1846년 6월 12일 |
임기 종료 6 | 1846년 8월 6일 |
대통령 6 | 마리아노 파레데스 본인 |
이전 부통령 6 |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
다음 부통령 6 | 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 |
출생일 | 1786년 9월 10일 |
출생지 | 치치후알코, 누에바에스파냐 |
사망일 | 1854년 4월 22일 |
사망지 | 칠판싱고, 게레로, 멕시코 |
정당 | 중앙 집권주의자 |
2. 초기 생애
브라보는 1786년 9월 10일, 칠판싱고에서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레오나르도 브라보와 Gertrudis Rueda de Bravo|게르트루디스 루에다 데 브라보es였다. 1810년 9월 멕시코 독립 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아버지, 형제들과 함께 반군에 가담했다. 처음에는 아버지 밑에서 싸웠고, 2년 뒤에는 베라크루스 지방으로 이동하여 코스코마테펙을 점령한 부대를 이끌었다. 팔마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이후 아버지의 패배와 투옥, 그리고 죽음을 겪어야 했다. 브라보는 왕당파 포로 300명을 풀어준 일로 관대하다는 평판을 얻기도 했다.
멕시코 독립 전쟁 (1810년 ~ 1821년) 동안 니콜라스 브라보는 남부 전선에서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 휘하에서 싸웠다. 1811년에는 에르메네길도 갈레아나의 군대에 합류하여 베라크루스주 지역의 작전권을 확보했다. 또한 칠판싱고 의회를 방어하는 데에도 참여했다.
멕시코 독립 전쟁이 끝나고 1821년 9월 27일, 브라보는 에제르키토 트리가란테와 함께 멕시코 시티에 입성했다. 독립이 이루어지자 그는 선거인 의회에 의해 주의 참모로 임명되었다.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가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후, 브라보는 최고 행정 권력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행정부 역할을 수행했다. 이 시기 그는 이투르비데파 장군 루이스 데 킨타나르에 맞서 할리스코에서 승리하는 등 국가 안정화에 기여했다.
1817년, 브라보는 멕시코 남부에서 체포되어 수도로 압송되었고, 1820년 스페인의 자유주의 정부에 의해 사면될 때까지 3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
1821년에는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가 발표한 이구알라 계획에 참여했으며, 이투르비데는 그를 대령으로 임명했다. 이후 제헌 의회는 브라보를 국무원 의원이자 섭정 위원으로 임명했고, 이 섭정 위원회는 이투르비데가 제1 멕시코 제국의 황제로 즉위할 때까지 국가를 통치했다.
3. 멕시코 독립 전쟁
1817년 왕당파 세력에 의해 투옥되었으나, 1820년에 석방되었다. 이후 이괄라 계획에 동참했으며, 1821년 9월 27일에는 에헤르시토 트리가란테(Ejército Trigarante)와 함께 멕시코 시티에 입성했다. 멕시코가 독립을 달성하자, 제헌 의회에 의해 국가 참모로 임명되었다.
4. 멕시코 제1제국 시기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가 황제로 즉위하자, 브라보는 이에 반대하여 오아하카에서 군대를 모아 관리부를 형성하고, 푸에블라를 거쳐 멕시코 시티로 진격했다. 이투르비데가 점차 독재적으로 변해가고, 산타 안나가 1823년 그에 대항하여 베라크루스 계획을 선포하자, 브라보는 다시 한번 정부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다. 그는 1823년 1월 5일 멕시코시티를 떠나 비센테 게레로와 합류하여 남부 지역에서 혁명을 일으키려 했다. 이 과정에서 브라보는 안토니오 벨라스코의 아내 마리아 페트라 테루엘 데 벨라스코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았는데, 그녀는 자금 마련을 위해 자신의 보석 일부를 저당 잡히기도 했다. 이투르비데는 멕시칼칭고 시장을 통해 브라보와 게레로의 행방을 파악하고 추격대를 보냈으나, 브라보는 추격하던 중령에게 뇌물을 주어 체포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부 사령관인 호세 가브리엘 데 아르미호 준장의 추격을 받아 알몰롱가 인근에서 교전이 벌어졌고, 브라보와 게레로의 군대는 패배했다. 이 전투에서 게레로는 폐에 총상을 입었으며, 게레로가 죽었다고 믿은 그의 부하들은 브라보가 막으려 했음에도 공황 상태에 빠져 흩어졌다.
브라보는 산타 로사 목장으로 피신하여 믹스테카 지역에서 재정비를 시도했고, 후아후아팜에서 안토니오 레온과 합류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혼타 데 로스 리오스라는 곳에 요새를 구축하고 오아하카로 향했다. 그곳에서 섭정 위원회를 구성하려던 중 카사 마타 계획을 알게 되었다. 그는 오아하카에서 모을 수 있었던 병력을 이끌고 수도로 진입하여 나머지 반란군과 합류했다. 결국 이투르비데 황제는 의회를 복원하고 퇴위를 제안했다. 의회가 이투르비데를 툴란싱고로 이송하기로 결정했을 때, 전 황제는 브라보에게 자신과 그의 가족을 호송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나중에 이투르비데는 브라보를 감시하도록 경호원에게 지시하면서 그에 대한 신뢰를 잃은 듯한 모습을 보였다.
5. 멕시코 제1공화국 시기
1824년 멕시코 제1공화국이 수립되자, 브라보는 초대 대통령 과달루페 빅토리아 밑에서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당시 멕시코 정계는 프리메이슨의 두 지부, 즉 중도 보수 성향의 los escoseses|스코틀랜드 식es과 자유주의 성향의 los yorquinos|요크 식es으로 나뉘어 있었다. 브라보는 스코틀랜드 식 지부의 지도자였으며, 1823년부터 1827년까지 이 지부는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1827년경 요크 식 지부의 세력이 커지자, 브라보는 정치적 위기감을 느끼고 요크 식이 장악한 연방 정부에 대항하는 군사 반란을 주도했다. 1827년 12월 23일 시작된 이 반란은 실패로 끝났고, 브라보는 결국 에콰도르로 추방되었다. 그는 정부 변화 후 1829년 멕시코로 돌아왔다.
5. 1. 부통령 재임
새롭게 수립된 제1 멕시코 공화국 시대에 브라보는 중앙집권당과 연합하여 강력한 단일 정부 수립을 지지했다. 여기에는 멕시코 내에 남아있던 스페인인, 상류층, 성직자 등 다양한 보수 세력도 함께했다. 당시 멕시코 정치는 프리메이슨 로지와 깊이 연관되어 있었으며, 보수주의자들은 스코틀랜드 의례 로지에서 활동하며 '에스코세스(Escocés)'로 불렸고, 브라보는 이 로지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에스코세스에 반대하는 세력은 연방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은 국가가 연방 제도로 운영되기를 원했고 다양한 자유주의적 입장을 대변했다. 이들은 요크 의례 로지에서 활동하여 '요키노스(Yorkinos)'로 알려졌다. 미국 헌법의 영향을 받은 멕시코 헌법은 대통령 선거에서 1위 득표자가 대통령, 2위 득표자가 부통령이 되도록 규정했다. 1824년 선거에서 브라보는 국가의 초대 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독립 전쟁 영웅인 과달루페 빅토리아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빅토리아는 '요키노', 브라보는 '에스코세스' 소속으로 서로 정치적 입장이 달랐다.
1827년 12월 23일, 부통령 브라보가 이끄는 에스코세스는 Plan de Montaño|몬타뇨 계획es을 발표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요키노가 지배하는 정부가 에스코세스를 탄압하려 한다고 믿고, 미국 대사 조엘 포인셋의 추방, 비밀 결사(프리메이슨 로지) 활동 중단, 당시 내각의 해임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 반란은 오래가지 못했고, 브라보는 과거 동지였던 비센테 게레로에게 툴란싱고에서 패배했다.
브라보는 대배심 앞에서 재판을 받았고, 사건은 대법원으로 넘어갔다. 법적으로는 반역죄에 해당하여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했지만, 멕시코 독립 전쟁에서의 공로 덕분에 옛 동료들의 동정을 받았다. 과달루페 빅토리아 대통령 역시 관대한 처분을 원했고, 결국 법원은 브라보에게 2년간의 국외 추방형을 선고했다.
5. 2. 추가 군사 경력
멕시코 독립 전쟁 (1810년 ~ 1821년) 동안, 브라보는 남부 전선에서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 휘하에서 싸웠다. 1811년, 그는 에르메네길도 갈레아나의 군대에 합류하여 베라크루스주에서의 작전권을 확보하고 칠판친고 의회를 방어하는 데 참여했다.
1817년 왕당파 세력에 의해 투옥되었으나 1820년에 석방되었다. 그는 이후 플랜 데 이괄라에 동참했으며, 1821년 9월 27일 에제르키토 트리가란테(삼보장 군대)와 함께 멕시코 시티에 입성하여 독립 달성에 기여했다. 독립 후에는 선거인 의회에 의해 주의 참모로 임명되었다.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가 황제로 즉위하자, 브라보는 이에 반대하여 옥사카에서 군대를 조직하고 관리부를 설립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푸에블라를 거쳐 멕시코 시티로 진격했으며, 이투르비데의 퇴위에 일조했다. 이투르비데가 물러난 후, 브라보는 과달루페 빅토리아 대통령(1824년 ~ 1829년) 정부 하에서 공화국 부통령을 역임했다.
당시 멕시코 정치계는 프리메이슨의 두 주요 지부, 즉 중도 성향의 스코틀랜드 식(''los escoseses'')과 상대적으로 더 자유주의적인 요크 식(''los yorquinos'')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브라보는 1823년부터 1827년까지 스코틀랜드 식 지부의 단장을 맡았고, 이 시기 해당 지부는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졌다. 그러나 1827년경 요크 식 지부의 세력이 급격히 성장하자, 브라보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위협받는다고 판단하여 요크 식 메이슨들이 장악한 연방 정부에 대항하는 군사 반란(몬타뇨 반란)을 주도했다. 1827년 12월 23일에 시작된 이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사형 요구도 있었으나, 그는 결국 에콰도르로 추방되었다. 이 추방 과정에서 외동딸을 잃는 개인적인 비극을 겪었다.
브라보는 비센테 게레로 대통령이 부여한 사면 덕분에 1829년 멕시코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귀국 후에도 그는 보수당을 계속 지지했으며, 같은 해 할라파 계획에 참여하여 게레로 대통령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였다. 게레로 대통령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반란 진압에 나섰으나, 1830년 1월 수도를 비운 사이 축출되었고 보수파인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가 정권을 장악했다. 게레로는 체포되지 않고 남부 지역에서 저항을 이어갔다. 브라보는 게레로의 주요 자금원인 아카풀코 항구와 요새를 점령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도시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1831년 1월 칠판싱고 전투에서 승리했고, 이 승리가 게레로의 저항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 것으로 평가되어 의회로부터 명예의 검을 수여받았다.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의 보수 정부는 1832년 베라크루스 계획으로 알려진 반란으로 인해 무너졌다. 브라보는 처음에는 반군을 인정하는 것을 주저했으나, 반란의 핵심 인물이었던 산타 안나의 설득으로 결국 반군을 지지하게 되었다.
이후 브라보는 여러 정부 요직을 거쳤으며, 1839년에는 임시 멕시코의 대통령으로 지명되기도 했다. 멕시코-미국 전쟁 (1846년 ~ 1848년)이 발발하자 그는 미군에 맞서 싸웠으나, 1847년 9월 13일 차풀테펙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그는 1854년 4월 22일 칠판친고에서 사망했다.
6. 멕시코 중앙집권공화국 시기
1834년, 멕시코는 새로운 헌법 제정과 함께 멕시코 중앙집권공화국 체제로 전환되었다. 1836년, 텍사스 혁명으로 멕시코가 텍사스를 상실한 직후, 브라보는 북부 군대를 지휘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환멸을 느끼고 칠판싱고로 은퇴했다.
이후 그는 여러 정부 요직을 거쳤으며, 1839년과 1842년에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멕시코-미국 전쟁 (1846년 ~ 1848년)이 발발하자, 그는 미국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1847년 9월 13일, 차풀테펙 전투에서 미군에게 포로로 잡히는 시련을 겪었다. 1854년 4월 22일, 그는 고향인 칠판싱고에서 사망했다.
6. 1. 첫 번째 대통령직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가 대통령직에 복귀한 후, 1839년 브라보는 그의 국무원 구성원으로 초청받았다. 부스타만테가 호세 우레아의 반란에 맞서 군대를 지휘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자, 브라보는 1839년 7월 10일 의회에 의해 멕시코 공화국의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되었다.당시 국정 상황에 대한 불만이 높았고, 많은 장군과 지휘관을 포함한 대중 사이에서 헌법 개혁 요구가 커지고 있었다. 브라보 대통령은 이러한 문제들이 법적 절차를 통해 해결되기를 바랐다. 그는 국무원에, 헌법상 대통령보다 상위 기관인 최고 조정 권력(Supreme Moderating Power)에 국가 대표들의 뜻에 따라 헌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국민의 의사를 전달하도록 지시했다.
그의 첫 번째 대통령 임기는 9일에 불과했지만, 브라보는 자신의 임무를 열정적으로 수행했다. 사형 선고를 받은 강도 야네스가 교수형을 피하려고 자살하자,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시신을 공개적으로 전시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브라보는 경고의 의미로 시신을 교수대에 전시하도록 명령했다.
6. 2. 두 번째 대통령직
1842년, 니콜라스 브라보는 산타 안나에 의해 대통령직에 올랐다. 이는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 정부에 반대하여 마리아노 파레데스가 일으킨 반란과 그에 이은 산타 안나의 개입 결과였다. 1841년 10월 6일, 부스타만테는 에스탄수엘라 협정을 통해 권력을 포기했고, 군사 위원회가 구성되어 새로운 헌법 제정을 위한 의회 소집을 요구하는 타쿠바야 기본안을 마련했다.1842년 6월 10일에 소집된 새 의회는 강력한 연방주의 성향을 보였는데, 이는 중앙집권주의를 선호했던 타쿠바야 기본안 주도 세력, 특히 산타 안나의 의도와는 달랐다. 산타 안나는 의회 해산을 계획하며 1842년 10월 26일, 브라보에게 대통령직을 넘겼다. 브라보 역시 중앙집권주의자였지만, 선거를 통해 구성된 연방주의 의회를 해산하는 것에는 소극적이었다. 당시 실권은 산타 안나의 측근인 전쟁부 장관 호세 마리아 토르넬이 쥐고 있었다.
브라보는 의회에 새 헌법 수용 의사를 밝혔으나, 곧 후에호친고라는 작은 마을에서 의회 해산과 '유력자 위원회' 설치를 요구하는 선언이 발표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이 선언의 배후에는 토르넬 장관이 있었다. 브라보는 처음에는 의회를 안심시키려 했으나, 결국 반란 세력의 편에 서서 1842년 12월 19일, 의회를 해산하고 유력자 위원회로 대체하는 법령에 서명했다. 이는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조치라는 비판을 받았다.
의회 해산 당일, 셀라야 대대는 의원들의 의사당 진입을 막았다. 의원들은 의장 프란시스코 엘로리아가의 집에 모여 브라보에게 회의 속개 가능 여부를 물었으나, 브라보는 군대가 의회에 반대하고 있다는 답변을 보냈다. 의원들은 행정부가 무력을 동원해 의회를 해산시켰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브라보는 의회 해산 자체에는 반대했지만, 새롭게 구성될 유력자 위원회가 능력 있고 애국적인 인물들로 채워지도록 노력했다. 12월 23일, 위원회를 '국회'로 명명하고 80명의 위원 명단을 발표하는 법령이 공포되었다. 1843년 1월 6일, 발렌시아 장군을 의장으로, 킨타나 루를 부의장으로 하여 새 국회가 활동을 시작했다. 이 기간 동안 타쿠바야 기본안이 임시 헌법 역할을 했으며, 이를 지지하지 않았던 기존의 부서별 위원회는 해산되었다. 브라보는 대통령으로서 군사-의료 보건군 창설, 쿨리칸 조폐국 설립, 군인 증원, 공문서에 멕시코산 종이 사용 의무화 등의 정책을 시행했다.
한편, 타쿠바야 기본안 수립에 참여했던 마리아노 파레데스가 정부에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하자 브라보와 산타 안나는 그를 경계했다. 파레데스는 위원회 참여 제안과 멕시코 주 사령관 임명을 받았으나, 정부 비판 발언으로 체포되었다가 무죄 판결을 받았다. 결국 브라보는 산타 안나의 영향력 아래 꼭두각시처럼 행동하는 것에 염증을 느끼고 1843년 5월 5일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7. 멕시코-미국 전쟁
1845년 말, 텍사스의 독립을 인정하려 한다는 명분으로 에레라 정부를 전복시킨 보수주의자 마리아노 파레데스의 혁명에 브라보도 참여하였다. 파레데스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브라보는 부통령이 되었다.
1846년 4월 멕시코-미국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브라보는 멕시코 부서의 사령관 겸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푸에블라, 오아하카, 베라크루스, 타바스코 부서를 위한 군대의 장군이자 지휘관으로서 모든 정파의 단결을 촉구하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전쟁이 불리하게 전개되고 파레데스 정부에 대한 반대가 커지자, 파레데스는 1846년 7월 28일 사임하고 브라보에게 대통령직을 넘겼다. 그러나 브라보의 대통령직은 오래가지 못했다.
멕시코-미국 전쟁 동안 브라보는 미국의 침략에 맞서 싸웠으며, 1847년 9월 13일 벌어진 차풀테펙 전투에서 패배하여 미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7. 1. 세 번째 대통령직
브라보는 베라크루스에서 잠재적인 공격에 대비하여 도시를 요새화하던 중 수도로 소환되었고, 모소 장군으로 교체되었다. 그가 대통령직을 맡은 지 4일 만인 8월 3일, 베라크루스와 산 후안 데 울루아의 수비대가 과달라하라 계획을 선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8월 4일 새벽에는 살라스 장군이 천 명이 넘는 병력을 이끌고 수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전 대통령 파레데스는 그날 밤 도시를 탈출하여 자신이 파견한 일부 군대를 이끌고자 했으나, 아발로스 장군에게 체포되어 다시 수도로 보내졌다. 8월 6일, 비스카이노 레무스, 호세 라몬 파체코, 마르틴 카레라, 호세 우레아, 라몬 모랄리스 등 교전 당사자들이 모인 회의에서 브라보가 사임하기로 합의했다. 권력은 살라스 장군에게 넘어가게 되었다.7. 2. 차풀테펙 전투
멕시코-미국 전쟁 동안 브라보는 미국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그는 푸에블라 부서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수도 멕시코 시티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고 도시에서 철수했다. 이후 수도 방어에 참여하여 이전에 안드라데 장군이 맡았던 도시 남쪽 경계를 담당하게 되었다.몰리노 델 레이 전투와 카사 마타 전투에서 멕시코 군이 패배한 후, 브라보는 차풀테펙 방어 책임을 맡게 되었다. 당시 그의 휘하에는 2,000명의 병력이 있었고, 요새 건설 책임자인 몬테르데가 부사령관으로 함께 했다. 1847년 9월 12일, 미군의 차풀테펙 포격이 시작되었고, 다음 날인 9월 13일 본격적인 공격이 이어졌다. 브라보는 증원을 요청했으나, 시코텐카틀이 지휘하는 산 블라스 대대만이 지원에 나섰을 뿐이었다. 결국 전투는 멕시코의 패배로 끝났고, 브라보는 미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차풀테펙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브라보의 명성은 크게 손상되었다. 당시 총사령관이었던 산타 안나는 공식 보고서에서 브라보가 전투 중 목까지 차오른 물웅덩이에 숨어 있다가 그의 흰 머리카락 때문에 발각되어 포로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보고서는 브라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확산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
8. 말년
멕시코-미국 전쟁 동안, 그는 침략자들에 대항하여 싸웠으며 1847년 9월 13일 차풀테펙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전쟁 후 브라보는 자신의 명성을 지키려 노력했다. 그는 칠판친고로 은퇴하여 1854년 4월 22일 사망할 때까지 잊혀진 채로 살았다. 그는 아내와 같은 날 사망했는데, 이로 인해 두 사람이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 산타 안나가 아유틀라 계획으로 인해 발발한 반란과 싸우기 위해 그 근처에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그들의 죽음에 연루되었을 수 있다는 소문을 더욱 부추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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